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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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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7] 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하는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a),[8]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함께 관리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잡한 사회구조와 다양한 민족과 언어[9] 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줄여서 오헝 제국이라고도 부르며, 독일어권에서는 k. u. k.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2. 국가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독일어: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 (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
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 (어 비로덜미 터나치번 케프비셸트 키라이샤고크 에시 오르사고크 에시 어 머저르 센트 코로너 오르사거이)
정식 국호의 뜻은 국가협의회(라이히스라트)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다. 국가협의회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은 빈 제국의회의 의원을 뽑는 나라들이며, 성 이슈트반(헝가리의 초대 왕)의 왕관은 헝가리의 왕이 대대로 써온 왕관으로 이 왕관의 영토는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 국가협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별도로 언급된 것은 헝가리가 이제는 국가협의회의 일원이 아닌 독립적인 의회와 체제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어권에서는 제국이자 왕국 또는 황립 및 왕립이라는 의미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저리히 운트 쾨니크리히), 약칭 k. u. k.(카 운트 카)로 불리기도 했다.[10] 여기서 차용한 카카니아(Kakania)[11] 라는 명칭도 있다.
2.2. 국기[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주권국가의 이중 군주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통합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국기를 따로 사용하였으며[12] 합스부르크 어기, 즉 오스트리아의 국기와 헝가리의 국기를 이어붙인 국기를 쓸 때도 있었다.
상선기의 용도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국기와 헝가리 왕국의 국기를 합친 바리에이션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상선기는 각종 매체나 게임에서 널리 사용되어 유명하다.
2.3. 국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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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구 및 민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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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위 지도는 미국의 지리학자인 윌리엄 R. 셰퍼드 박사가 1911년에 작성한 지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략적인 인구분포를 표현하고 있다.[14]
이중제국의 마지막 인구통계인 1910년 자료에 따르면 이중제국 전체의 인구는 총 51,390,223명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시스라이타니아)에 28,571,934명이, 크로아티아와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에 20,886,48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공동통치령인 보스니아에는 1,898,044명[15] 이 거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인구통계 조사에서 민족이 아닌 모어 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했다. 즉 통계자료는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 분포가 아닌 언어 분포인 셈. 따라서 인구통계에는 어느정도 누락되는 정보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언어 사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기간인 1910년 인구통계의 종교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중제국 인구의 약 4.4% 가량인 22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유대인(유대교 신자)이었다.[16] 제국내 유대인 대부분은 이디시어가 모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대개 도회지에 거주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이나 헝가리인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또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고 있어 교육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때문에 유대인 중에는 당대 주류언어라 할 수 있는 독일어나 헝가리어 구사가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결론적으로 인구통계에서 '유대인'은 대부분 독일어나 헝가리어 화자로 집계되었다.
또다른 예시로 훗날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민족분쟁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 역시 위 지도에서는 단일한 세르보크로아트어 사용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종교조사 통계자료로 당대 인구조성을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파일:오헝 민족분포(발칸).webp
[17]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에 대한 인구조사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에 다소간 차이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주로 달마티아 왕국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모두가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로 조사되었다. 반면 헝가리 왕국 및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인구조사에서는 남슬라브어 및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상당히 세세하게 분류했다. 헝가리 내에서는 세르비아어 사용자와 크로아티아어 사용자를 구분했음은 물론, 왕국 내 거주하는 남슬라브의 군소 하위민족집단들도 별도로 집계되었다. 이런 민족집단들은 주로 당시 헝가리 왕국 남부지역, 오늘날의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등지에 주로 거주 중이었다. 헝가리 왕국이 조사한 기타 왕국내 남슬라브어 사용주민들로는 부녜브치인(Bunjevci)[18] , 쇼크치인(Šokci)[19] , 크라쇼바니인(Krashovani)[20] , 바나트 불가리아인[21] 등이 있다.
4. 경제와 산업[편집]
4.1. 발전상[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러시아와 함께 유럽의 구 질서를 수호하는 주요 축이자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유럽 세계의 주요 열강 중 하나였다. 오헝 제국은 필요한 물품의 대다수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 수준도 매우 발전된 나라였다.
제국의 주요 수출품은 기계와 전자제품이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공업단지가 체코 필젠 스코다(Škoda) 사 공장에 있었다. 이곳에서 각종 철강 제품들과 건설자재들, 엔진, 증기기관, 군사 무기들을 비롯한 기계 제품들이 생산되었다. 스코다 사의 제품들은 공장이 있는 필젠의 필스너 맥주 양조장부터 미국의 나이아가라 수력발전소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오스만 제국의 설탕공장과 청나라 북양군의 병기창까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었다.
수도 빈은 기차를 포함한 각종 기계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은 전통적으로 철광석이 생산되었는데다 슈타이어-만리허로 대표되는 총기 생산의 중심지였다. 한편 트리에스트와 풀라는 해양 진출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이탈리아인들이 트리에스테 기술 회사(Stabilimento Tecnico Triestino)나 트리에스테 해군 조선소(Cantiere Navale Triestino) 같은 조선업체를 운영했다. 이 중 STT사는 제국 조선업에 있어서 가장 선도적인 회사였으며 기술의 총아인 드레드노트급 전함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22] 이들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조선사 핀칸티에리의 자회사로서 유명한 크루즈 여객선들을 다수 건조하고 있다.
중공업을 지탱하는 제철 및 제강 산업의 경우, 그 선두에는 오스트라우에 위치한 로스차일드의 비코비체 제철소(Witkowitzer Bergbau- und Hüttengewerkschaft)가 있었다. 비코비체 제철소는 자체적인 철광석 및 석탄 광산들과 수 개의 고로들을 가진 오헝 제국 최고의 철강 생산 업체였으며, 해군의 장갑재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장이었다. 그럼에도 제국 내에서의 철광석 수급량은 필요량에 비해 모자랐기 때문에, 비코비체는 스웨덴 라플란드의 철광석 광산에 투자하여 연간 철광석 사용량의 10퍼센트 가량인 4만 톤을 스웨덴에서 충당했다.[23]
비코비체는 1870년대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으나 새 경영자로 들어온 파울 쿠펠비저(Paul Kupelwieser)의 지도 하에 경영을 쇄신하여 중동부 유럽의 가장 거대한 제철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미 여러 국가의 제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쿠펠비저는 벨기에의 신식 제철 설비를 들여와 생산 품질과 양을 일신했다. 제국 멸망 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도 중요한 제철소로 남았으며 공산정권 시절에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199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체코의 주요 산업 유적으로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 외에도 스코다의 필젠 제철소,[24] 전통적인 철강 산업 지역인 슈타이어마르크 일대의 오스트리아 알프스 광업조합(ÖAMG)이 대표적인 제철업체였다. ÖAMG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인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세운 회사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운영 중인데, 현재는 포스코와 협력해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도 한 오스트리아 대표 제철업체인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 사의 자회사다. 카를 비트겐슈타인 소유의 다른 주요 제철소로는 체코 프라하 근교에 위치한 폴디 제철(Poldi Hütte)이 있었으며 이곳 역시 오늘날까지 운영 중이다.[25]
식품 가공업이 주산업이던 부다페스트는 19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의 2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여 각종 기계 제품과 전자제품, 그리고 차량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자제품 분야에 있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출량은 주요국, 심지어 프랑스까지 제치고 한때 세계 3위에 달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부다페스트의 대기업인 건즈(Ganz) 사가 유명했다. 수력 발전 플랜트와 암모니아 냉매를 사용한 냉장고, 변압기, 발전기 그리고 전기철도 등을 생산했는데 부다페스트 지하철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깔린 도시철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의 발전된 전기 기술 덕분이었다. 그 외 건즈 사의 엔진 및 각종 기관 생산 부서도 부다페스트에 있었으며, 피우메에 거점을 둔 조선 부문인 건즈-다누비우스(Ganz-Danubius)는 오헝 제국 해군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센트 이슈트반함과[26] 주력 보조함인 타트라급 구축함들을 건조했다.
한편 헝가리 왕립 국영철도기계공장(MÁVAG)도 각종 강재와 철강 제품, 차량과 증기기관 등을 생산하며 건즈 사와 호각으로 경쟁했다. MÁVAG의 기관차들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성능을 보유한 기관차들로 유명했으며, 제국의 주요 장갑열차들도 여기서 생산했다. FÉG사는 소화기 생산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UFAG 사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항공기 업체들도 전부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헝가리 북부의 오즈드 일대의 리마무라니살고타르얀 제철소(Salgótarjáni Kohászati Üzemek)[27] 등에서도 강철을 생산했으나 그 비중은 체코와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는 미미한 편이었다.
그 외 폴란드의 바쿠라 불린 갈리치아에서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석유 시추와 정제업이 성행했다. 갈리치아 덕에 19세기 말 오스트리아는 세계 4위의 산유국이었다.
4.2. 한계[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공업 발전상과 기술적 성취는 경이적인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경제 규모는 여전히 다른 열강들에 미치지 못했다. 1990년 달러화 기준으로 평가한 1913년 오스트리아의 실 GDP 규모는 100,515백만 달러로, 237,332백만 달러의 독일 제국, 254,448백만 달러의 러시아 제국, 224,618백만 달러의 영국의 절반 이하였다. 프랑스 역시 144,489백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의 1.5배 규모였으며, 주요 라이벌인 이탈리아 왕국은 95,487백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1인당 GDP를 계산해보면 이탈리아가 2,564달러, 오스트리아가 1,986달러로,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밀렸다.#
근본적 원인은 제국의 발전이 지역별로 매우 불균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국의 영토는 유럽 동남부의 험준하고 빈곤한 산악지대와 유럽의 주요 공업 지대, 그리고 지중해에 매우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UCL 슬라브 및 동유럽학대학의 야쿱 베네시(Jakub Beneš) 교수는[28] 체코나 오스트리아 또는 연해 지대 등의 일부 지역들이 동시대의 다른 유럽 국가들의 평균적인 수준보다도 더 발전되어 있었으며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 역시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경제 전반은 1918년 멸망 전까지 농업(agrarian) 위주였다고 설명한다.#
산업지대, 즉 석탄이 생산되는 체코와 철광석이 생산되는 슈타이어마르크, 빈과 부다페스트의 공장들, 트리에스트의 항구는 카이저 페르디난트 북부제국철도를 통해 이어져 있었던 데다가, 인접한 독일의 경제권이나 바다의 국제 유통망을 통해 수출과 수입이 용이했기에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평균치보다도 훨씬 발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보스니아 등 내륙 지역은 높은 디나르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에 걸쳐 있거나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타지와의 연계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이들 산맥 때문에 오헝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각 도시의 유통망을 연결하는 경제 대동맥인 운하를 건설하는 건 꿈도 못 꿨으며, 수천 미터의 깎아지른 산봉우리를 뚫고 옆 마을로 갈 비포장 도로 건설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는 운하가 쓰이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의 산업혁명을 가로막고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발전을 방해한 주 원인이었다.
게다가 넓은 달마티아 해안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깊고 험해지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제국의 주요 무역항은 북서부에 치우친 이스트리아 반도의 트리에스트와 피우메, 풀라 뿐이었으며 세 도시는 당연히 제국 동부와 내륙지역과는 너무나도 멀었다. 한때 중개무역으로 번영했던 달마티아 지역의 두브로브니크나 차라 등의 항구는 산맥 때문에 접근성이 나빴으며 이미 무역항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국제하천인 도나우강을 통해 남동쪽에 인접한 세르비아나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등의 국가들과 연계된 무역망을 구축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오헝 제국의 잠재적 적국이자 분쟁지대에 위치한 경제적 후진국이었다.
▲ 1920년 갈리치아 스타니슬라비우의 농촌 초가집
빈곤 문제의 최고봉은 갈리치아였다. 갈리치아는 동북쪽 카르파티아 산맥의 장벽 바깥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고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테셴[29] 지방을 통해서만 제국 중심부에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이 지역들은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와 기존 지배층 간의 타협에 의해 전통적인 지주제가 유지되었다.[30] 때문에 갈리치아는 항상 빈곤과 기근에 시달림에도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제때 지원을 받지 못해 매년 수만의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제국 면적의 3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고작 6퍼센트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가난한 동네였다. 이 지역 내부의 산업 비중을 살펴보자면 1910년 기준으로 78.71%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고작 6.77%였다. 종합하자면, 오헝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는 극단적인 격오지였다.
이들 지역들은 자연스럽게 국제, 국내 교통망에서 밀려나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제국 면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31]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보스니아 지역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으며 여기서 생산되어 수출된 밀은 한때는 러시아 제국의 수출량보다도 많았을 정도였다. 심지어 당대 부다페스트 곡물거래소의 밀 거래량은 미국 미니애폴리스 곡물거래소의 거래량보다 많았다. 서부 지역에서도 오스트리아 서부 산악지대와 같은 지역들은 양 치고 젖 짜서 치즈나 만드는 농촌들이 다수였다. 가령 티롤의 경우 공업 종사자는 고작 16.51%, 반대로 농업 종사자는 자그마치 56.71%에 달했다.
이러한 제국의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에너지 원료의 종류별 비율이다. 1910년경 영국에서는 에너지 원료의 80퍼센트를 석탄으로 충당했으나, 오헝 제국은 고작 33퍼센트에 머물렀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바이오매스, 즉 목재였다. 이는 대다수의 지역의 근대화가 미비하여 주민들이 여전히 나무를 베어 난방에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제국의 석탄 생산량 자체가 적고,[32] 유통도 주요 산업지대 외에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기다 1873년 빈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발생한 전 세계적 규모의 장기불황은 이런 양극화를 고착시켰다. 오헝 제국이 공황을 제대로 얻어맞으면서, 철도 등의 각종 인프라와 산업화를 동쪽 내륙까지 확장하려던 시도가 한동안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 공황의 여파로 인해, 헝가리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보스니아나 트란실바니아 등의 진짜 격오지들은 제국의 멸망 때까지 산업화를 사실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낙후된 영토들이라도 주변 동유럽이나 남유럽 또는 비유럽 국가들에 비해는 사정이 괜찮기는 했다. 1930년대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의 문해율 지도를 보면 오헝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곳의 문해율이 비교적 양호한 결과가 나왔고 오헝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대체로 잘 살았던 편이다. 보스니아의 경우 열악한 결과가 나왔지만 이쪽은 겨우 30년간 지배받았고 정식 병합 시기는 오헝 제국이 망하기 10년 전인 1908년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한때 서유럽 세계의 중심이기도 했을 정도로 핵심적인 열강이었던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신생국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발칸 국가들은 체급 자체가 작았고,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1차 대전 직전까지 여러 차례의 발칸 전쟁을 거치며 내실을 다질 기회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내우외환과 열강의 경제 침탈 때문에 마찬가지 상태였다. 열강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제력은 이들보다는 당연하게도 확실히 앞섰으나, 다른 주요 열강들과 비교할 때는 명백히 열세였다.
노동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산업감찰관직을 신설하고 독일 제국 못지않은 사회보장제도를 만드는 등 당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꽤나 우수한 노동자 복지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타협으로 인해 내정이 분리되어 있었던 고로 이 정책은 제국의 나머지 절반인 성 이슈트반 왕관령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시스라이타니아에에서도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가까웠다. 산업혁명기의 다른 열강 국가들에서처럼 오스트리아의 많은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에 시달렸다.[33]
1888년 세워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노동자 대표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꾸준히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막상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1912년 합동으로 전시징발법(Kriegsleistungsgesetze)을 제정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전쟁 시 총력전을 위해 국가가 민간사업자들에 대한 제한 없는 동원이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발칸 전쟁으로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군대에 대한 효율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추진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1914년 7월 26일부로 실제로 발동되었다.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 대학교의 포가니 아그네스(Pogány Ágnes) 교수에 따르면 전시동원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제국의 총력전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재정이 나누어져 있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잡음이 잦았던 기존과 달리, 전시동원법을 통해서는 효율적인 재정 운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제국이 러시아, 이탈리아, 세르비아와 동시에 3면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4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법안을 통해 국가가 제국 내의 경제력을 극한까지 짜내면서 반대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업은 금지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크게 제한받은 데다 농업 생산량까지 감소하였다. 이로 인해 제국 체제의 대들보나 다름없던 군대의 인기는 갈수록 하락했고 정부에 불만이 가중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1917년부터 정부는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억누르지 못했으며 1918년, 결국 제국 정부는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은 전후에도 길게 남았다. 제국의 나머지 영토들을 전부 독립시키고 생겨난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지역들에서는 우파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이 의회 의석을 쓸었다. 하지만 제국 시대 이래로 주요 공업지대였던 수도 빈만큼은 노동자층이 탄탄하게 자리잡았던데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채 돌아온 군인들이 모여들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몰표를 던져버렸다.
5. 영토[편집]
행정 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빈 근교에서 도나우강(Donau)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천 라이타(Leitha)강을 기준으로 잡아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은 시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은 트란스라이타니아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에서는 시스라이타니아(1~15번), 트란스라이타니아(16~17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8번) 순으로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각 지역의 로마자 알파벳순으로 매겨져 있다.
6. 역사[편집]
6.1. 형성[편집]
1848년 3월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8~1916.11, 재위 1848.12~1916.11)는 신 절대주의 (바흐 절대주의) 통치를 유지했지만 국내의 많은 불만을 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프랑스 제2제국 연합군과의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패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함과 동시에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1859.7) 독일 연방에서는 북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을 무시하다가 발발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해(1866.7), 프라하 조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고[40] 동시에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편에 가담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베네토까지 상실하며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배제당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에게 연패를 당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자[41] 합스부르크 황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신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소수민족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제국이 공중분해될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과 황실을 보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종전의 신 절대주의 체제를 철회하고 이때까지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황제의 제안을 받은 헝가리인 지도층 사이에서는 제안의 찬성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황제의 제안에 반발했고 헝가리인들 대다수 역시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라며 반대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친 합스부르크 성향의 헝가리 자유주의자들은 제안에 찬성하였는데,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훗날 자유당을 창당하는 데아크 페렌츠는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던 민족주의자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극단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다. 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 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대타협을 통해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통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대타협 유지파 정당인 데아크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고 중도좌파나 극좌파에만 표를 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데아크당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비(非)헝가리인 소수민족들이 몰표를 던져줘서 간신히 절반 이상의 의석을 점할 수 있었다. 헝가리인들이 갈망했던 독립은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던 소수민족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외무부 장관이 된 반프로이센파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1809 ~ 1886)이 재상으로 재직중인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야 했기에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양측의 계산이 일치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첫번째 조건이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사도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를 하였다. 그리하여 1867년 6월 8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헝가리 대표 데아크 페렌츠가 서명하고 새로 구성된 헝가리 의회가 이를 비준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는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42]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고 심지어 독일계 역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의 소수민족은 유대인과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있었다.
6.2. 대외 정책[편집]
이런 상황에도 제국은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국가가 1884~1885년의 베를린 회담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군력이 뒤떨어졌던[43] 오스트리아는 가까운 발칸 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를 오스트리아의 동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국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지했고, 프랑스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정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는 판로를 확장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의 발칸 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발칸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쉽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주도해 온 독일계가 독일 민족 국가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리 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침도 변경되어서 원래는 제국 소속의 소수 민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칸 반도의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쳤지만, 이 시기부터는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이런 팽창 정책으로 발칸 반도를 노리던 다른 주요 국가였던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아졌을 때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빠르게 승기를 잡아서 큰 손실을 얻지 않았고, 원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영토에 대한 영향권을 합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 변경을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전에 1908년 오스만 제국이 '통일 진보 위원회(청년 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44] 이러한 조치는 남슬라브 민족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러시아와도 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5]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오스만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독일뿐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동맹은 독일만 남게 되었다.
6.3. 대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편집]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해운 및 대외 식민지의 운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연히 열강이면서도 다른 열강이나 식민제국들과는 달리 대규모 대외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인 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의 비중이 높은 다문화 제국의 특성상 본국과 식민지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 간혹 제국 내 타 영토들에 비해 이질적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식민지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사학자들에게 보스니아는 식민지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중제국이 대외 확장에 아예 무관심한 건 또 아니었다. 1858년[46] 부터 니코바르 제도에 원정을 보내면서 식민지화 가능성을 검토했다. 하지만 1886년 원정에서 영국의 점유를 확인 후 포기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하며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매각하려고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해군력 증강의 명분이 될 대외 식민지 확보의 일환으로 여기에 관심을 보였으나 식민지 확보에 미온적인 헝가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다른 열강들과 함께 진압에 참여하여[47] 톈진 조계의 일부를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 획득했다. 톈진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7. 사회[편집]
7.1. 시스라이타니아[편집]
오스트리아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사상을 강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와 소수민족 통치 경험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에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심각한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제와 느슨한 집행 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Schlamperei, 엉터리)'적 관행이라고 불렀다.
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에서 여러 사상가와 (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특히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밑에서 일할 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에서 소련 내부의 민족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의회의 정당 구성을 보면 과격한 민족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까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건 사회민주주의 성향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인, 빅토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이었다.[48] 제국 내 소수민족인 체코인이나 이탈리아인 등도 의정활동에 참가했다. 체코계 의원들은 보헤미아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분리하여 헝가리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1911년 제국의회에서는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였다.[49] 이런 자치권에 대한 의견관철과 논의는 당연하게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소수민족 의원들은 종종 보이콧으로 맞서곤 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회는 수시로 의정활동이 마비되었고, 의정활동보다는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칙령으로 통치와 행정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개인에게는 업무부담이 과중되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실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워커홀릭 성향에다 경직된 권위주의 가부장적 사고 및 행동이 큰 원인이지만 슐람페라이적 관행 역시 그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더 넓게 봤을 때, 당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물론 이후의 중부유럽에서도 의회민주주의 정착이 지연된 것이기도 했다.[50] 또한 이런 상황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의회민주주의나 소수민족의 정치적 권리에 환멸을 느끼고 나치즘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느슨하고 관대한 통치에는 부작용이 뒤따랐지만 만약 소수민족에게 강압적인 통치를 한다면 대번에 문제가 생길 것이 명확했으니[51] 슐람페라이적 관행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슐람페라이적 관행은 이중제국 체제 및 그 현상유지의 태생적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보장 제도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고 몇년 간 직업이 없어도 노숙자용 무료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밖에 공립 대학이나 고등 교육도 무료였는데,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 또한 상당히 자유로웠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 사이에선 미혼, 기혼 상관 없이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폴란드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억눌린 민족들(submerged nations)'이 독립을 위해 이미 투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 독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억눌린 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마자르족에게 헝가리 왕국이라는 준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중 군주국'으로 재편했다. 헝가리 왕국은 독일인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인들'과 군주(1848년 이래로 줄곧 통치한 프란츠-요제프 황제), 군대, 재정, 외교만을 공유했다. 독일인처럼 (그리고 사실 부다페스트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때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을 본뜰 만큼 크게 찬탄한 영국인처럼) 마자르족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이라고 여겼고 헝가리 왕국 내 슬라브 소수 민족들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중 군주국 서쪽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북부(체코인), 북동부(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남부(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슬라브족뿐만 아니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탐내는 알프스 산맥 남사면의 이탈리아권(독일어권 남 티롤도 포함)을 다스렸다. 부다페스트의 거친 마자르족 소지주들과 달리 빈의 합리적 관료들은 피지배 소수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했고 독일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빈의 정부 기구는 마비되고 황제가 칙령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성한 문화 융합은 분명히 빈을 지적·예술적으로 활기 넘치는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우려와 함께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봤다.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수백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는 제국 내 국민들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에게까지도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구조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에 호의적이지 않기 쉬웠고, 소독일주의에도 반대했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 독일이 세워진다면 수가 적은 독일계로 소수민족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 백작 등이 주창한 통일안은 '독일인들의 민족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토를 신생 독일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대(大)오스트리아주의에 가까웠다.
시스라이타니아의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다.[52] 일례로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제국의 몰락이 눈에 보이기 전에는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53]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조차도 이 노선을 고수했다. 체코의 또 다른 분리 운동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도 체코인들이 제국이라는 틀에서 나오게 된다면 독일과 러시아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라 보고 제국 내에서의 자립을 추구했다.[54]
그러나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사실상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체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55]
1917년 1월 말까지도, 체스키 스바즈(Českého svazu)의 최고 회의에서는 두 번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17년 1월 24일의 회의에서는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체코 민족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는 제국의 틀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성취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1917년 1월 31일 회의에서는 '체코 민족은 합스부르크의 군주국 이외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으며, 발전의 조건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1917년 5월 30일 제국의회에 참여한 체코 의원들도 황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 민족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56]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언어적으로도,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용어가 없었고 1867년 기본법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물론 독일계 위주로 나라가 굴러갔던 건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이타니아의 다문화적 관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빈 의회인데, 의도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여 필리버스터를 유도하는게 가능했으며, 특히 체코인 의원들이 자주 이 방법을 써먹었다.[57]
7.2. 트란스라이타니아[편집]
오스트리아 제국과 달리 헝가리 왕국에서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헝가리 의회는 크게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과 대타협 반대파인 독립당[58] 두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총선에서 헝가리인들은 독립당을 주로 지지했으며, 소수민족들은 주로 자유당을 지지했다.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 성향 정당들 역시 존재했지만, 이들은 1~2석 정도로 큰 힘이 없었다.
헝가리에서는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아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는데, 상당수의 헝가리 대의원들은 3자리 수, 또는 4자리 수에 불과한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1910년 마지막 총선 기준 전체 헝가리 인구 1800만 명 중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11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이는 전체 인구의 6.4%에 불과했다.[59] 이는 보통 선거가 도입될 경우 헝가리인들의 몰표로 총선에서 패배가 확실한 자유당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보통 선거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자유당의 필사적인 저지로 끝내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은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기를 집권 여당으로 존재했다. 독립당은 190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집권했지만, 이들 역시 대타협을 파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독립당 정부는 1909년 헝가리 국립 은행 설립 문제로 분열해 무너졌고, 총선 참패 후 자진해산했던 자유당 세력이 국민노동당을 창당하여 1910년 총선에서 압도적 과반을 먹는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을 다시 되찾았다.
또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마자르화 정책으로 헝가리 내의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 정체성의 붕괴를 걱정해야 했으며, 그 중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인과 연대해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8. 군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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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재편성 계획[편집]
9.1. 대오스트리아 합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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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이중제국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안되는 독일계와 헝가리계가 국가운영을 주도했다. 때문에 주로 슬라브계인 다른 민족들 역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반독립국가와도 같은 지위나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 반세기에 이르는 이중제국의 존속 기간 내내 체제 모순 극복을 위한 여러 재편성안이 제기되었다. 이런 재편성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이다.
합중국 계획은 기존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구성된 제국을 민족별로 동등한 주권을 부여받은 주로 구성된 연방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안하고 루마니아계 정치가 아우렐 포포비치(Aurel Constantin Popovici)가 1906년 세부 안건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실권을 지닌 황제와 독일계, 헝가리계가 반대하였고 결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뒤이어 벌어진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면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은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9.2. 삼중제국[편집]
위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과 별개로 1880년대에 태동하여 루돌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제 카를 1세의 지지도 받았던 재편성 계획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일명 삼중제국 재편성 안이 있다. 삼중제국은 과거 헝가리인들에게 동등한 주권을 줬듯이 동등하지만 제한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완전히 동등한 주권을 줘서 제국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이었다.
파일:삼중 제국 제안안.png
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 이스트리아 반도 전역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파일:제안안2.png
당시 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이스트리아 반도의 일부와 보스니아만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개인의 이상이었던데 반해 삼중제국 안은 1880년대부터 존재하여 오스트로-슬라비즘 세력들의 지지와 추후에는 황제의 지지까지 받았던 안이었지만 제국 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헝가리 왕국의 반대로[60] 번번히 미뤄지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이 다다른 1918년, 크로아티아인들이 지지 의사를 철회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어떻게 보면 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안의 선배이자 실현에 더 가까웠던 안이지만 비슷하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산된 개편안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만약에 승전하여 제국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삼중제국은 실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면 삼중제국 개혁안 역시 대타협과 다를 바 없이 지배자가 하나 더 늘어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보기 어렵다. 제국에는 크로아티아인 외에도 여러 피지배민족들이 있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민족주의 세력 역시 강해질 것을 생각하면 삼중제국이 실현되었어도 계속 안정적으로 굴러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크로아티아인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훨씬 강하였던 체코인들은 자신들에게도 크로아티아와 동등한 지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10. 해체[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여했다가 패전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한데 묶여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하고 소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제위에서, 11월 16일에 헝가리의 왕위에서 밀려나 제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해체 수준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휘청거리자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비슷한 이유들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바나트, 서우크라이나, 크라쿠프[62] 등이 독립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가 10월 31일에 혁명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생제르맹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처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시킬 생각은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전황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다 지금은 같은 편으로 싸우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적대관계로 돌변할 지 모르는 러시아 제국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국가로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었다.[63]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후에 들어선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보다 세력이 예전보다 훨씬 위축된 나라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살려둬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해체된 제국 내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수립,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모든 독일어권 지역들을 영토로 선포했으나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과 협상국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영토만을 가지게 된다.
다만 설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거나 승전했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19세기 후반부터 계속 해체 위기를 넘기면서 아슬아슬하게 버텨 왔었기 때문이다. 이 의견은 옛날 학계가 고수했던 정설이었으나, 최근 학자들은 이런 결정론적 시각에 반대하며, 제국의 해체가 필연이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한편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을 해체하고 새로이 생겨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역시 다민족 국가였고, 제국 시절보다 더한 민족갈등[64] 과 종교갈등[65] 을 내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등으로 간신히 눌려 있던 민족갈등은 결국 20세기 말까지 가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맞고 나서야 봉합되게 된다.[66]
2차세계대전 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시키자, 이에 놀란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부활시켜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공산화된 헝가리 및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유고슬라비아는 티토를 중심으로 공산화되었기에 이를 포기하고 만다.
11. 황제[편집]
12. 출신 및 주요 인물[편집]
황실 인물은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로.
- 정치인, 군인 및 공무원
-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 독일계 정치인[67]
- 카를 폰 슈튀르크 - 독일계 정치인[68]
- 티서 이슈트반 - 헝가리계 정치인[69]
- 카를 레너 - 독일계 정치인[70]
- 엥겔베르트 돌푸스 - 독일계 정치인[71]
- 쿠르트 슈슈니크 - 독일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72]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독일계, 체코계 정치인[73]
- 아돌프 히틀러 - 독일계 정치인[74]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이탈리아계 정치인[75]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체코계 정치인[76]
- 에밀 하하 - 체코계 정치인[77]
- 밀란 호자 - 슬로바키아계 정치인[78]
- 요제프 티소 - 슬로바키아계 사제, 정치인[79]
- 살러시 페렌츠 - 헝가리, 아르메니아, 독일, 루신, 슬로바키아계 정치인[80]
- 너지 임레 - 헝가리계 정치인[81]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 폴란드계 정치인[82]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폴란드계 정치인[83]
- 유제프 할레르 폰 할렌부르크 - 폴란드계 군인, 정치인
- 스테판 반데라 - 우크라이나계 정치인[84]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85]
- 안테 파벨리치 - 크로아티아계 정치인[86]
- 프란체스카 도너(이부란) - 유대계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 시몬 비젠탈 - 유대계 나치 사냥꾼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독일계 군인[87]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크로아티아계[88] 군인[89]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계 군인[90]
- 헤르만 쾨베스 폰 쾨베샤자 - 독일, 헝가리계 군인[91]
-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불명)[92] 군인[93]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불명)[94] 군인[95]
- 호르티 미클로시 - 헝가리계 군인, 정치인[96]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 독일계 군인[97]
- 에르하르트 라우스 - 독일계 군인[98]
- 로타르 렌둘릭 - 크로아티아계 군인[99]
- 프란츠 뵈메 - 독일계 군인[100]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101]
- 오딜로 글로보츠닉 -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102]
- 아돌프 아이히만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103][104]
- 오토 스코르체니 - 폴란드계 나치 친위대원, 군인[105]
- 아몬 괴트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106]
- 바소 추브릴로비치 - 세르비아계 암살[107] 자, 교수, 정치인
- 알로이스 히틀러 - 독일계 공무원[108]
- 알프레트 얀자 - 독일계 군인
- 작가
- 프란츠 카프카 - 유대 및 체코계 작가
- 카렐 차펙 - 체코계 작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독일계 작가
- 로베르트 무질 - 독일계 작가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작가
- 슈테판 츠바이크 - 유대계 작가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유대계 작가
- 학자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유대 및 독일계 심리학자
- 알프레트 아들러 - 독일계 심리학자
- 빅토르 프랑클 - 유대계 심리학자
- 알렉시우스 마이농 - 이탈리아계 심리학자, 철학자
- 에른스트 마흐 - 독일계 철학자
- 오토 바이닝거 - 유대계 철학자
- 에드문트 후설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포퍼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카우츠키 - 체코계 철학자
- 테오도르 헤르츨 - 유대계 언론인, 시오니즘 운동가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유대 및 독일계 철학자
- 쿠르트 괴델 - 독일계 수학자, 철학자
- 에르되시 팔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조지프 슘페터 - 독일 및 체코계[109] 경제학자, 철학자
- 오토 노이라트 - 독일계 경제학자
- 카를 폴라니 - 헝가리, 유대계 경제학자
- 루트비히 볼츠만 - 독일계 물리학자
-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 - 유대 및 독일계 물리학자
- 에르빈 슈뢰딩거 - 독일 및 영국계 물리학자
- 그레고어 멘델 - 독일계 사제, 유전학자
-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유대계 병리학자
- 화가 및 음악가
- 구스타프 클림트 - 독일계 화가
- 에곤 실레 - 독일계 화가
- 구스타프 말러 - 유대계 음악가
- 안톤 브루크너 - 독일계 음악가
- 프란츠 폰 주페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로트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독일계 음악가
- 슈트라우스 가문 - 독일계 음악가 가문
- 칼 미하엘 치러 - 독일계 음악가
- 안톤 베베른 - 독일계 음악가
- 알반 베르크 - 독일계 음악가
- 아르놀트 쇤베르크 - 유대계 음악가
- 한스 아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111]
- 프리츠 크라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 에리히 클라이버 - 독일계 음악가
- 카를 뵘 - 독일계 음악가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리스, 슬로베니아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헝가리계 음악가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유대계 음악가
- 프란츠 리스트 - 헝가리계 음악가
- 코다이 졸탄 - 헝가리계 음악가
- 벨라 바르톡 - 헝가리계 음악가
- 도라 페야체비치 -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계 음악가
- 에르뇌 도흐나니 - 헝가리계 음악가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체코계 음악가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체코계 음악가
- 레오시 야나체크 - 체코계 음악가
- 요제프 호프만 - 폴란드계 음악가, 발명가
- 연예 및 스포츠계 인물
13. 기타[편집]
- 올림픽이나 국제 축구 경기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3개 팀이 출전했다. 1901년에는 헝가리 축구 연맹이, 1904년에는 오스트리아 축구 연맹이 설립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경기가 이 시절이던 1902년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서로를 상대로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보헤미아 대표팀 역시 19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첫 경기를 가졌다. 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된지 얼마 안된 시점인 1920년대 당시 유럽 축구의 주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했었던 중부 유럽 국가들이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스위스, 루마니아등 이들 나라의 축구단들이 모여서 만든 최초의 국제 축구 대회가 바로 미트로파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중단되기전까지는 유럽에서 제일 위상이 높은 대회였다. 전쟁이 끝나고 1951년에 대회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미트로파컵을 말고도 또다른 국제대회들이 있었기 때문에 흥행이 안되어서 다시 중단되었다가 1955년에 재개되어 대회가 진행되었지만 이 무렵에는 유러피언컵이 창설되어 대회 인기를 모두 유러피언컵에게 빼앗기고 마이너 대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로는 1934년 월드컵에서 양 국가가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했는데, 기묘하게도 8강에서 이 둘이 맞붙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게 2:1 승리를 거두었지만 준결승전에서 하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원수였던 이탈리아를 만나게 되었고 0:1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의 우승 제물이 되고 만다. 그로부터 20년 후, 1954년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같은 조에 묶이게 되었고 헝가리는 준결승전에서, 오스트리아는 3위 결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를 꺾고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게 된다.
-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 인물이자 모델인 트랍 대령은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잠수함장이자 사령관 출신이다.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것이다.
- 2017년 연립정부에 참여한 오스트리아 자유당 대표는 TV토론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지역협력체인 비셰그라드 그룹에 오스트리아가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까지 비셰그라드 그룹에 가입하면 이들 나라의 지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비슷해진다. #
- 조선과는 1892년에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수교했다. 당시 다른 통상조약들이 그랬듯이 이 조약도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체결 과정 역시 군함을 이용한 군사적 위협이 수반된 포함외교의 성격이 있었다. #
13.1. 매체에서[편집]
-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소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북극 탐험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 패러독스가 제작하고 유통하는 게임이며 19세기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리아 2에선, 게임 시작 시점에는 아직 대타협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헝가리 민족국가 형성 반란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물리치고 나면 대타협을 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 독일계 소국들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권에서 빼앗으려는 프로이센과 역시 통일을 위해 롬바르디아를 되찾으려는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영 좋지 않은 꼴이 되기 마련이다. 플레이어가 잡으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본문에 언급되었던 재편성을 통해 도나우 연방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 Hearts of Iron IV에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3국을 모두 통합시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선포가 가능하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를 무찌르고 본래의 영토까지 획득해내고 나면 그 지역까지 핵심 주로 편입시켜 완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활이 가능하다. 특히 헝가리는 아예 오스트리아-헝가리 부활을 목표로 하는 루트(균형 잡힌 예산안>합스부르크 대공 초청>오스트리아와의 국민투표)가 따로 있다.[112] 다만 멀티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필수이기 때문에 안슐루스가 원천봉쇄, 덤으로 체코의 주데텐란트까지 다 먹어버리고 유고와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에 딸려온 불가리아까지 몽땅 뜯어가기에 안슐루스&뮌헨협정 트롤이 필연적이라 이 둘로 국가를 키우는 파시독일/파시이탈 루트에서 독일/이탈리아 유저의 앞길을 막기 때문에 독일유저가 독일연방~유럽연합/2제국 복원 루트를 가거나 독일과 상의해 동맹을 맺지 않으면 트롤픽이 되는 경우가 많다.
-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오헝이 승전국이라 제국 자체는 존속해 있지만 카를 1세가 소수민족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약속한 대가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속국 헝가리, 보헤미아, 일리리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이후 7차 대타협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설립하여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도나우 연방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 SCP 세계관에선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오헝 제국이 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지원해 전쟁 억지를 위한 여러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들고 보니 사용하는 자신들도 이해를 못 하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고, 협상국도 비슷한 무기를 가지고 반격하는 바람에 제국이 사라진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사자가 나오고 있다.
- 유럽전쟁 6:1914에서는 개별 시나리오도 있고 1914 정복과 1917 정복에서도 3성국인데다가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로 나오는 등 비중 있는 국가로 나온다.